‘한일관계’ 진정성이 있으면 통한다
우태희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전자신문 칼럼
한국과 일본 경제계가 6년 만에 만났다. 9일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고바야시 켄 일본상의 회장이 발표한 공동성명서에는 양국 경제 공통과제 해결을 위한 협력 촉진, 지방 차원의 교류 재개, 엑스포 유치 상호협력 등을 최우선 추진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한일 경제를 대표하는 지역상의 회장들이 교류하는 모습도 오랜만에 펼쳐졌고, 오찬 행사를 통해 밀린 회포를 풀기도 했다.
양국 경제인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한일관계가 본궤도에 오른 덕이 크다. 셔틀외교가 복원되면서 2019년 시작된 일본의 수출규제가 해제 절차를 밟고 있고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시찰단 파견, 원폭 한인 피해자 위령비 공동참배 등이 이뤄졌다. 양국 젊은이들 중심으로 문화교류 폭이 넓어지면서 변화의 바람이 확산됐다. 국내에서 올해 4월까지 일본 영화가 크게 흥행하며 총매출 1133억원, 관객 수 1085만명을 기록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집계를 시작한 2009년 이후 최고치다.
그러나 이따금 터져 나오는 과거사 이슈를 보면 여전히 반일 감정의 벽은 높아 보인다. 한일관계가 다시 악화되는 것을 막으려면 작게나마 ‘공동의 이익’을 찾아야 한다. 깊은 불신이 한 번에 해결될 수는 없겠지만 작은 성과를 쌓아가면 큰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나올 수 있다.
양국이 서로 도울 수 있는 대표 분야는 경제협력이다. 첫째,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정에서 서로의 취약점을 보완해야 한다. 미래전략산업의 공급망 강화는 혼자의 힘으로 실현할 수 없고 뜻을 같이하는 나라들이 뭉쳐야 한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달 삼성전자, TSMC 등 7개 반도체기업 대표를 만나 일본에 투자할 것을 요청한 것도 이러한 이유다. SK, 미래에셋 등 우리 기업들도 일본 소재·부품·장비 업체에 투자하는 펀드를 조성하는 등 공급망 협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일 기업인이 서로 손을 내밀고 끌어줄 수 있다면 미래세대의 먹거리로 돌아올 것이다.
또 하나의 분야는 일자리다. 일본은 한국에 앞서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구인난을 겪고 있다. 일본 정부는 노동력 부족에 따른 중소기업 폐업으로 GDP가 대폭 줄어들 것으로 전망한다. 반면 한국은 4월 제조업 취업자가 28개월 만에 최대 폭으로 감소하는 등 구직난이 심해졌다. 이 미스매치를 양국 협력으로 풀 수 있다. 공동 구인 플랫폼을 운영하고 취업박람회를 활성화하며 전문인력 교류를 늘리는 등 당장 실행할 수 있는 아이디어도 많다.
물론 ‘공동의 이익’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협력관계를 이어가려면 ‘진정성’이 중요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독일 경제학자 베르너 귀트가 고안한 ‘최후통첩 게임’이다. 참가자 A가 B에게 돈을 어떻게 나눌지 제안하는데 B가 수락하면 제안대로 받고, 거절하면 A와 B 모두 받을 수 없다. A가 99:1로 나누자 제안해도 거부하면 한 푼도 받을 수 없으니, B는 제안을 수락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실험 결과 대부분은 거절했다. 그만큼 진정성이 느껴져야 협력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일상의 회장단 회의 재개는 양국 기업인이 협력할 수 있는 플랫폼이 복원됐다는 의미가 있다. 양국 협력의 관건은 ‘파이의 크기’가 아닌 ‘나누는 방식’이 될 것이다. 진정성이 있다고 느껴야 ‘공동의 이익’을 나누는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최 회장이 목발을 짚고 회의에 참석한 것도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앞으로 공동성명서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양국 기업인이 더 자주 만나 토론하고 협력하면서 해결책을 모색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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